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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태의 노가다 일기] ④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 (1) K 형님
일용직으로 일하면 그날 어디로 배정받을지 모르고 새벽에 인력사무소에 갑니다. 요즘은 강동구청 리모델링 공사 현장에 자주 나갔습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사는 노원구 인력사무소에서 일해왔지만, 12월 말 친구의 소개로 강동구 쪽 인력사무소에 일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현장에서 저와 가장 많이 일한 사람은 K 형님입니다. 저보다 2살 많은 53세십니다. 젊었을 때 친척뻘 되는 사람이 운영하는 중소기업도 오래 다녔고, 작은 식당을 차린 적도 있다고 하고, 1년 전까지는 오토바이 퀵서비스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K 형님은 제가 만난 수많은 현장 사람들 중 가장 독특해 소개를 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일을 요령 피우지 않고 아주 열심히 합니다. 현장에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묵묵히 열심히 하는 편이긴 합니다. 현장 일을 하면서 쓰는 힘을 1~10까지 놓고 봤을 때 5 정도의 강도로 꾸준히 합니다. 반면 K 형님은 8의 강도로 계속 일합니다. 저는 마대자루에 담긴 폐기물을 가벼운 것은 두 개, 무거운 것은 한 개를 나릅니다. 반면 K 형님은 가벼운 것은 세 개 이상, 무거운 것도 두 개씩 나릅니다.
그리고 본인은 담배를 안 피우면서 저보고는 일이 한 매듭만 지어지면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쉬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같이 잠시 쉬다가 이내 주변 정리 같은 걸 합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고 담배를 피우라고 하고선 얼마 안 있어 일을 시작하니 같이 일하던 사람이 “그러면 우리가 눈치 보인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떨어져있는 자재 활용… 회사 물건 자기 것처럼 아끼는 주인의식
여기까지는 현장에서 그래도 볼 수 있는 사람 유형입니다. 그런데 K 형님의 특이한 점은 주인의식입니다. 건물 공사를 할 때 외벽에 쇠로 된 비계(=아시바)를 설치하고 그물처럼 생긴 안전망으로 감싸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때 ‘결속선’이라는 얇은 철사로 안전망을 봉에 묶는데, 새 결속선으로 묶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형님은 새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바닥에서 헌 결속선이 발견되면 그걸 주워서 사용하는 겁니다. 이전 현장 사람들이 버려두고 간 것들이죠. 결속선은 현장에 널브러져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현장 일한 지 오래되었는데, 새 결속선이 있으면서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 쓰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K 형님은 작업 지시 전에 할 일을 예상하고 공구도 준비해 놓고, 일을 예측해서 더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런 바람에 아파트 건설현장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현장 직영직원이 K 형님에게 “용역에서 나온 사람 중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봤다. 다들 시간만 때우고 가려 하는데 유별나다. 그렇게 나서서 일을 하면 (작업 지시하는) 나는 뭐가 되느냐”는 식의 핀잔을 준 것이었습니다. 말이 핀잔이지 그 직영 직원이 말하는 스타일이 거칠고 잔소리가 심해서 일하는 내내 같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K 형님과 가끔 정치 얘기 나누면 저와 생각이 많이 다르기는 합니다. 지면의 특성상 구체적인 예를 들 수는 없지만 삼성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 공판 있던 날 “우리 경제를 위해서 재벌 회장들 감방에 보내면 안 된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관점 차이는 그 사람을 판단하는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K형님을 보면서 새삼 느낍니다. 저는 K 형님이 좋습니다.
늦잠으로 지각했는데도 “아침밥 먹고 오라”며 배려
며칠 전 제가 알람을 맞춰 놓지 않아 현장 도착 시간인 6시 35분이 지나서도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K 형님 전화를 받고 깨 7시 20분 넘어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K 형님은 인력사무소나 현장소장에게 말을 하지 않고, 요령껏 잘 해주셔서 들키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 시작하고 난 후 아침밥을 못 먹은 저를 위해 현장 옆 식당에서 몰래 먹고 오라고 해서 먹고 오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루 일당을 벌게 해 준 고마운 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나중에 작은 기업이라도 차린다면 K 형님은 채용하고 싶습니다. 아니, 지금이라도 강동구 인근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분이 있다면 적정한 보수로 K 형님을 쓰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굳이 감독하지 않아도 쉬지 않고 자기 일을 할 것이고, 회사 물건을 자기 것처럼 아낄 것이며, 안 시킨 일도 회사에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현장에서 잔소리를 했던 직영반장도 K 형님이 안 보이자 다른 동료들에게 왜 안 나오냐고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렇게 잔소리를 해 놓고선 속으로는 형님이 예뻐보였던 모양입니다.
겨울철에는 추위 때문에 공치는 날이 많아 일할 기회가 주어지는 게 귀한 일이다.
K 형님은 관리자 스타일은 아닙니다. 둘이서 일할 때가 아니라 여럿이서 일할 때 같이 일하던 31살 동료도 K 형님은 직원들 데리고 일하라고 하면 아마 일 시켜 놓고 남들 쉬엄쉬엄하라고 하면서 일은 자기가 다 할 거라고 웃으면서 얘기 나눈 적도 있습니다.
연일 이어지는 강추위로 강동구청 같은 관공서의 실외 공사는 중단되었는지 3일째 K 형님을 못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4시 58분에 전화벨이 울려 깨보니 K 형님이었습니다. 일을 나가게 되어 있었는데, 형님 집 보일러가 추위로 터져서 수리하느라고 일을 못 나가니 저보고 대신 나가달라는 전화였습니다.
형님 사정을 생각하면 나가고 싶었지만 오늘 낮에 할 일이 있어 못 나간다고 했습니다. 형님은 인력사무소에 연락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새벽에 전화 한 것이 예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수도 있지만, 추위 때문에 공치는 일용직이 많은 요즘 저에게 일할 기회를 준 것이고 저로서는 고마운 전화입니다.) 형님 집 보일러 수리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형님 같은 분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글 / 권병태
(happitice@hanmail.net)| 작성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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