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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태의 노가다 일기] ② 나를 버틸 수 있게 하는 것, 꿈
며칠 전 얘기를 나눈 스무 살 상현이는 그동안 꿈이 없었다고 한다. 시장통에서 식당을 한 부모는 어린 시절 부부싸움이 심했고, 그나마 아버지가 몇 년 전에 돌아가시면서 어머님과는 의절 상태로 기초생활수급자로 동생과 살아왔다고 한다. 꿈도 재능이든 그 무엇이든 가진 것이 있어야 꿀 수 있는지도 모른다. 상현이에게 꿈은 그동안 사치였다.
현장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은 대체로 자영업을 하다가 망한 분들이 많다. 영등포에서 공구상을 한 분, 나이트클럽 조명 설비업자, 개 사료 업자, 심지어 배를 탄다고 선수금을 받고는 타지 않아서 빚쟁이로 도망 다니는 사람까지. 이들은 꿈이 있다기 보다는 처와 아이들에게 돈을 부치는 것을 가장 큰 의무이자 보람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일과 후에는 다음 날 일을 하기 위한 재충전만 있을 뿐이다.
현재의 동료들을 봐도 자기 개발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전무하다. 밤에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30대 이하의 젊은 사람들은 피시방에 가서 게임을 주로 한다. 낮에 일하면서 쉬는 시간에도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한다. 뉴스를 보는 경우도 드물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는 거의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바깥 세상에서 무슨 얘기를 하든 말든 관심 밖이다.
쉬는 시간에 책을 읽고 틈날 때마다 글을 쓴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만 살라고 하면 현장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 건설 현장 일은 무척 힘들다. 육체적으로 고된 것뿐만 아니라 쇠깎는 연기를 마셔야 하고 먼지구덩이에서 살다시피 한다. 이런 생활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삶의 목표와 지금의 일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흔히들 ‘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내겐 책이 필요하고 경제와 국제문제를 포함한 세상사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래서 일을 끝내고 샤워 후에는 조용히 사라져서 혼자만의 공간에서 책을 보고 오곤 했다.
그런데 요즘 부쩍 태클이 들어오고 있다. 이 생활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고, 밤에 잠을 자지 않으면 다음날 일에 지장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면 맞는 말이다. 외눈박이의 섬에서는 두 눈을 가진 사람이 비정상이다. 책을 보는 문화가 전혀 없는 곳에서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같은 책을 읽고 있으면, 처음에는 좋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이질적인 존재로 배척당할 것이 뻔하다. 급기야는 팀을 떠나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육체 노동과 재충전을 위한 휴식만으로 소중한 시간을 다 채우긴 싫다. 그래서 동료들이 뭐라고 하든 밤에 조용히 사라지고, 다음 날 어디 갔다 왔냐고 물으면 시내 배회를 하고 왔다고 대답하곤 한다. 이 글도 현장에서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등 틈날 때마다 썼고, 지금도 현장에서 연장근무 중이다.
도스또예프스키를 읽어도 눈치 보이지 않는 날이 올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호모 폴리티쿠스, 즉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다. 정치 공동체인 폴리스가 존재하고, 개인은 폴리스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정치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는 사람만이 온전한 의미의 인간이라는 얘기다.
그런 그런 시민들이 정치적 공론을 나누기 위해서는 심사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상의 일들을 대신 처리해 주는 노예가 필요하다고 했다. 정치인들뿐 아니라 대기업 CEO, 장군 등 어떤 분야의 선택권자들이 비서를 두는 것도 이런 맥락일 수 있다.
고대의 노예노동이 그러했듯, 건물을 짓는 막노동은 우리 공동체 내에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그 일을 나와 내 동료들이 하고 있다. 막노동, 청소, 식당 뒷처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많이 배우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 선택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건설현장 일용직 팀원 중 하나가 밤에 도스또예프스키를 읽어도 팀원들 눈치가 보이지 않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선거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고, 일용직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정하는 ‘인간’이 되는 그 날이 올 수 있을까? 그 날로 향하는 길을 찾고 있고, 큰 틀에서는 그 길의 윤곽을 잡아가는 중이다.
며칠 뒤에 상현이와 둘이서 술 한 잔 하기로 했다.
글 / 권병태
(happitice@hanmail.net)| 작성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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