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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
내 세포들의 상점을 가득 채운 건 트레이시와 치치올리나,
제니시스, 허슬러, 그리고 각종 일제 전자 제품들,
세운상가는 복제된 수만의 나를 먹어치웠고
내 욕망의 허기가 세운상가를 번창시켰다
–유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중에서
1980년대 비디오 게임기와 가정용 오디오를 직접 샀던 사람이라면 세운상가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현재의 우리에겐 추억에 더 가까운 공간이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름만 듣고 아는 고전 명작 소설 같은 곳 같달까. 과거의 시간만을 추억하기엔 세운상가에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지금 세운상가엔 누가 살고, 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세운상가에 대해 알던 것, 그리고 지금 알게 된 것들을 만나봤다.
세운상가는 타워팰리스의 원조다?
세운상가 개관 당시 사진 @안녕하-세운 홈페이지
세운상가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배경으로 탄생하게 된 건축물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판자촌과 상권이 활발해진 공간에 서울시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건설해야 한다는 미션이 주어졌다. 1966년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이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라는 뜻에서 ‘세운(世運)’이라 이름 붙이고,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김수근의 설계를 필두로 건물을 만들게 되었다.
종로에서 충무로 일대까지 총 1km에 달하는 구간, 독특한 건물 구조 등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형태는 한국 최초로 오늘날 주상복합건물의 원조인셈. 이 독특한 건축물에 대한 관심은 연예인, 사회 유명인들이 앞다투어 입주를 희망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세운상가에서는 미사일이나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197, 8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전자제품 상가로 최대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세운상가는 세 번이나 철거될 뻔 했다?
세운상가 건설 당시 모습 @안녕하-세운 홈페이지
세운상가는 독특한 역사를 가진 공간이다. 도시 난개발의 상징인 동시에 최근에는 도시 재생의 시발점으로 불린다. 세운상가 철거는 1990년대 이후 강남 개발과 용산전자상가, 양재국제종합전자상가 등이 생기면서 빠르게 침체기를 겪게 되면서부터였다.
1995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에서는 세운상가 부근을 재개발해 공원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지만, 보상비 문제로 철거가 미뤄지게 되었다. 또 한 번의 위기는 2003년 청계천 복원 사업과 함께 찾아왔다. 청계천 주변 상가의 정비를 이유로 많은 상인들이 자리를 떠나게 되고, 세운상가의 공중 보행테크가 철거되면서 주변 상권이 악화된 원인이 되었다.
지속적인 상권 침체로 인해 2008년 본격적인 세운상가 철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중 현대상가의 철거가 가장 먼저 이뤄졌다. 이후 차례로 진행될 뻔한 철거는 입주민들과의 보상문제 등을 이유로 연기됐다. 2014년에는 종묘 문화제 건물 앞 고도, 낮은 사업성 등을 들어 기존 철거 계획은 모두 백지화되고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탈바꿈했다.
세운상가는 여러 개다?
세운상가의 큰 그림은 8개의 상가를 공중 보행로를 통해 이동할 수 있고, 서울 중심 상권을 확장한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안녕하-세운 홈페이지
종로3가역에서 종묘 방향으로 걷다 보면 오른 편에 즐비한 상가들 가운데 세운상가(정확한 이름은 세운전자상가)가 보인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2008년 철거된 현대상가까지 포함해 총 8개의 상가를 모두 ‘세운상가(세운상가군)’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세운상가 조성때부터 ‘세운상가 조정사업’이라 이름 붙였던 것에서 이유를 찾곤 한다.
당시 김수근 건축가는 설계 초안과 전체적인 건축 마스터 플랜만을 제시하면서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구상했던 것. 다만 지금은 시공을 맡은 다양한 건설회사들에 맞게 건축되면서 저마다의 개성(?)이 강한 전혀 다른 건축물들의 집합이 되어버렸다.
세운상가 5층에는 화장실이 없다?
세운상가 8층에서 내려다 본 풍경. 과거 주거 공간이었던 이곳은 공동 공간이 없다.
세운상가는 주상복합건물이다. 상가 건물이 끝나는 5층부터는 주거 공간으로 쓰인 아파트가 이어진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독특한 구조의 아파트가 그 주인공. 중앙이 뚫려 있어 난간에 서면 모든 층을 볼 수 있으며, 빽빽하게 놓여 있는 공간들은 우리가 알던 과거의 복도식 아파트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지금은 이곳을 주거 공간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상가 사무실이나 창고, 기술 장인들의 작업실로 쓰고 있다. 업무 목적으로 만든 오피스가 아니라, 공용 공간이 따로 없다.
세운상가에는 전자상가만 있다?
팹랩 서울의 실험실
세운상가를 둘러보면 각종 음향기기는 물론 전자기기, 조명 기기 등 다양한 제품들이 망라해 있다. 윗층으로 올라가면 5층부터 이어진 아파트형 오피스에는 각 분야의 기술 장인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다가 다시 재생되는 동안에도 수리를 하고,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2015년 2월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자리를 잡은 이들이 그 주인공. 모든 기계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팹랩 서울, 수리하는 장인이 모여 만든 수리수리협동조합, 세운상가 기술기반 기업 입주와 지원을 돕는 사회적경제지원센터, 보일러실이었던 공간을 새롭게 바꾼 세운메이커스라운지 등이 있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젊은 창업가의 아이디어와 세운 장인들의 기술을 결합한 서비스들을 선보이고 있다.
도움말 서울시 도시재생본부 재생정책기획관 역사도심재생과 다시세운사업팀 오승제
글 / 정은주
(jej@i-db.co.kr)| 작성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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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T 산업의 시작을 이끌어 낸 게 이곳이 아닌가 합니다. IT산업의 태생지로서 기술력을 가진 세운상가 장인들과 젊은 창업자가 힘을 합치도록 유도해 지금보다 더 많은 시민들이 찾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네요.